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유럽 혁명 (문단 편집) === [[폴란드 인민 공화국]]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dw.com/0,,17410953_303,00.jpg|width=100%]]}}}|| || {{{#000,#fff 1989년 2월 6일부터 4월 5일까지 열린 자유노조-공산당 간 원탁 회의, [[바르샤바]]}}} || [[폴란드 인민 공화국]]은 경제적으로 그리 안정된 국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 국가치고는 인민에 의한 정치변동이 일어나는 보기 드문 국가였으며 1956년과 1970년에 시위를 통해서 지도자가 교체되는 과정을 겪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면적인 자유화 조치가 일어난 건 아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의 [[오일 쇼크]]와 외채위기로 파산상태에 직면하게 되자 노동자들의 반발이 다시금 커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레흐 바웬사]]의 주도로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자유노조]](Solidarność)가 설립되어 반정부 투쟁이 일어났다. 당시 공산정권에서도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일단 자유노조를 인정했다. 하지만 [[1981년]] 12월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Wojciech Witold Jaruzelski) 장군이 에드바르트 기에레크의 후임 서기장 [[스타니스와프 카니아]]를 몰아내고 [[서기장]]에 오르면서 계엄령 선포[* 야루젤스키 본인은 이후 인터뷰[[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0&aid=0000323811|#]]에서 당시의 계엄령 선포 및 자유 노조 탄압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브레즈네프 독트린]]에 따라 소련이 [[1956년 헝가리 혁명]]이나 1968년 [[프라하의 봄]] 때처럼 폴란드에 무력 개입할 의사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으며 개혁 자체에 대해서는 공감한다고 밝혔다.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를 단행할 시 야루젤스키는 그의 강력한 우군 중 하나이기도 했다.[[http://www.hankookilbo.com/v/0d2c50ccdd354416afb430329d492abb|#]]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비밀문서에 따르면 "[[1981년]] 야루젤스키가 계엄령으로 자유노조를 탄압한 상황에서 새로 집권한 [[유리 안드로포프]]는 [[소련군]]이 폴란드 군사개입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공개된 바 있다.]를 통해 이를 철저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이후 10년 가까이 같은 [[폴란드]] 출신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지원 아래 반정부 투쟁은 계속 이어졌으며 바웬사는 가택연금 중이던 198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 그 노력을 인정받았다. 폴란드 정부의 강력한 긴축정책과 노동자 탄압에도 경제는 좀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명분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1988년에 들어서면서 해빙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했으며 1989년에 이르자 이러한 자유화 과정은 본격화되었다. 역사적인 [[폴란드 통일노동당|공산당]]-자유노조간 원탁 회의 결과 [[6월 4일]][* 이 날은 지구 반대편인 [[중국]]에서 [[천안문 6.4 항쟁]]이 일어났지만 모두 다 아는대로 유혈 진압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다.]과 [[6월 18일]] 두 차례에 걸쳐 [[폴란드 인민 공화국]] 최초의 상하원 자유선거[* 일부 의석(전체의 30%)에 대해서만. 하원에 공산당 할당 의석이 있었다.]가 실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원의 경우 자유노조가 원내 제2정당, 집권 공산당인 [[폴란드 통일노동당]](Polska Zjednoczona Partia Robotnicza, PZPR)이 1위를 차지했다. 공산당은 "자유 선거에서 '''단 한 석도 승리하지 못했다'''". 당시 폴란드 하원 자유선거에서 자유노조는 개선의석 135석(전체 하원 의석의 30%) 전 석을 휩쓸었다. 공산당은 오로지 배정의석으로만 1위를 했을 뿐이다. 그나마도 [[위성정당]][* 역시 선거로는 한 석도 얻지 못했다.]들이 국회가 열리자마자 공산당과의 연정을 해소하고 자유노조와 연정을 구성하기로 했다.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상원에서는 100석 중 자유노조가 99석을 가져가는 초압승을 거두었다. 나머지 1석은 [[무소속]]인데 이후 자유노조에 합류했다. 국회에서 선출하는 대통령직에는 원탁회의 합의에 따라 야루젤스키가 7월 19일 대통령에 선출되어 민주화된 폴란드 제3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공산당(통일노동자당) 인사를 총리로 임명하려다가 자유노조의 반발을 사 철회되고 자유노조 인사를 총리에 임명한 것을 계기로 정치적 입지가 완전히 뒤바뀌어 급속도로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실권은 개혁파로 완전히 넘어갔고 개혁의 지연과 옛 공산권 세력 잔류에 불만을 품은 개혁파들은 야루젤스키에게 조기퇴임 압력을 넣었다. 12월의 헌법 개정에서 국명을 폴란드 공화국으로 개명하고 사회주의 조항을 삭제했으며 1990년에 이루어진 완전한 자유 지방선거에서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자유노조가 승리했고 더불어 통일노동당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국방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 자리까지 자유노조로 넘어갔다. 야루젤스키는 10월에 결국 자유노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대통령 임기를 리셋하는 헌법 수정(amendment)에 동의하는 방식으로 대통령에서 퇴임했으며 이에 따라 임기 5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수정이 이루어졌다. 수정된 헌법에 따라 11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를 통해 [[레흐 바웬사]]가 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91년에는 드디어 완전 자유 총선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폴란드 공산당이었던 폴란드 통일노동자은 1990년 해산한 뒤 폴란드 사회민주당으로 재창당하였고 [[민주좌파연합]]을 거쳐 [[신좌파(폴란드)|신좌파]]로 재개편된 뒤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이후 바웬사는 경제정책을 말아먹고(...) 공산당이 재집권(!)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민주화는 이뤄냈다. 공산당의 재집권도 정당한 민주투표에 의한 것이라...] [[폴란드 망명 정부]]는 이때까지 [[런던]]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레흐 바웬사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망명 정부는 해체되었고 1935년의 폴란드 헌법 원문과 폴란드 대통령의 상징물 등이 레흐 바웬사에게 전달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